Leo Fortier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캐나다 퀘벡에 사는 사람인데 매 주일 교회에서 종을 치는 일을 했단다. 52년 동안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종을 쳤다. 처음에 그 기사를 읽으면서 몇 가지 사실이 놀라웠다. 우선은 52년 동안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웠고, 다른 교회도 한 번 가보지 않고, 친척도 방문할 일이 없었다는 융통성 없음과 비사교성이 놀라웠다. 내가 이 기사를 처음 대했던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성실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화거리였지만 요즘은 무엇 하나를 꾸준하게 한다고 해서 그것을 그리 대단한 덕목으로 생각하지 않으니까 아마 설교에 예화거리로도 사용하기 힘든 이야기가 되었다. 내가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받은 상이 개근상이었지만(요즘도 그런 상이 있는지 궁금하다) 요즘 같으면 감기에 걸려도 집에 쉬는 것이 병을 옮기지 않아서 차라리 덕이 되지 죽어도 학교에 가서 죽겠다고 열심을 부리는 것은 이기적이라고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현대인들은 한 가지를 꾸준하게 하는 것보다는 균형과 조화에 더 큰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사고에 구멍이 생겼다는 생각이 든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이기심이나 게으름 때문일까? 삶의 균형이라는 구실로 무엇 하나 꾸준하게 하는 게 없다. 열정을 가지고 무엇을 시작해도 실증이 날 즈음에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실용성이다. “이렇게 바쁜데 매일 아침 시간을 내어 기도를 하는 것이 과연 효과적인 것일까?” “아무리 하루에 한 두 시간은 꼭 책을 읽기로 했어도 피곤하면 쉴 수 있는 융통성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설교준비를 위해 그렇게 긴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과연 낭비는 아닐까?” 나는 한 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꾸준히 해서 나의 의지력과 정신력을 과시하겠다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난 원래 그렇게 꾸준한 사람이 아니니까(내 아내도 내가 뭐든지 꾸준하게 하는 걸 별로 못 보았다고 했으니까 나의 꾸준하지 못함은 이미 공인된 것이다). 나는 지금도 꾸준함보다는 균형과 조화에 더 가치를 두니까.
그런데 아니다. 그래서 내가 가장 효과적으로 살았는가 생각해보면 하기 싫고 힘들어도 그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했더라면 너무 좋았겠다 싶어 후회스러운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지금 즈음이면 참 좋은 습관으로 자리를 잡아 내게 훨씬 더 유익할 수 있었겠다 싶은 것들을 그 때는 실용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주저없이 포기했었다. 즐김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루한 훈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바빠서 못한다 말할 것은 아니다. 시작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말할 것도 아니다. 이제는 꾸준함 그 자체에 훨씬 더 큰 가치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미련하다 싶을 만큼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도 성공적인 결과보다는 성실하고 꾸준한 과정일 듯싶다. 꾸준히 해야 할 다시 찾아봐야겠다. 진정으로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다면 현대인들에게는 개근상을 부활시켜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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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집
그래서 '한결같다'는 말이 더욱 더 친근하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오래전부터 묵묵히 한가지 봉사를 해오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의 한결같음이 저를 거듭나게 합니다.